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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Masquerade 극단 웹사이트

뮤지컬 마틸다 앙상블 오디션


작년 가을쯤, 비가 억수로 내리는 날.
오디션을 보러 가야 하는데 엄두가 안 났다.

여건이 되지는 않지만 연기하고 노래 부르고 싶은 마음에 지원한 오디션. 날씨가 참 비협조적이었다.
그래도 그 쏟아지는 비를 뚫고 잘 다녀왔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슈퍼에서 산 우유를 계산만 하고 두고 와 버려서 다음날 다시 찾으러 가기는 했지만.. 꼭 노래를 부르고 나면 머리가 멍~해져서 이런 실수를 더 하게 된다.. 본디 어리바리하여 평소에도 자주 하기는 하지요..🥲)

정말 오랜만에 심사위원 세 명 앞에서
준비한 연기와 노래를 했고 결과는 낙방.


그리고 반년 뒤,

그 극단에서 오디션 공고 메일을 보냈다.
연말에 판토 공연을 한단다.
오호, 내가 그렇게 못써먹을 것 같지는 않았나 보다.
아이 신나라! 하고 또 보러 갔다.



솔직히 풀타임 일에 자격증, 이직 준비로 피곤에 절어 있었지만 노래가 너무 부르고 싶었다. 쉬는 시간 틈틈이 모놀로그 대사를 외우고 어떤 노래를 부를지 고민했다.

틈틈이 외운 모놀로그

오디션 장소에는 무대 위의 배우를 꿈꾸는 10대 몰타 친구들이 잔뜩 있었다. 예쁜 몰타애들은 다 모여있는 것 같았다. 내가 외국인이고 나이 차이도 많이 나는데도 소통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과거 드라마 전공하던 때도 생각나고 재밌었다.

특이하게도 자기들끼리 얘기하는데도 몰타 말이 아닌 영어로 말을 주고받았다. ‘오늘 물리학 시험인데, 오디션 준비만 한 거 있지.’ 등등.. (얘들아 나는 오늘 퇴근하고 왔어! 🤓)

거기에 조용조용한 10대 러시아 아이도 있었는데 완전 인형이었다. 피부도 뽀얀 하고 얼굴에 반짝반짝 빛이 나 눈에 띄었다.

러시아 억양으로 말하는데 너무 귀여웠다. 내 눈에 하트 뿅뿅. 부모님이 자기 공부시켜보겠다고 몰타로 이사했다고 하는데 참으로 부러웠다.

잠깐, 여기서 내가 맡을 만한 역할이 있으려나..?
일단 나랑 겹치는 캐릭터인 사람은 1도 없으니 다행이다. 나는 그곳에서 유일한 동양인으로 원치 않아도 제대로 눈에 띄었다.

오디션


감독 - 한국인이에요?

나 - 네, 어떻게 아셨어요?

감독 - 성이 ‘박’이잖아요.

나 - 아 그렇죠 하하핫..

‘성이 박이어도 저를 ‘필리핀 사람’이냐고 묻던 영국 애도 있었습니다만..’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감독 - (옆에 심사위원을 향해) 우리 아내가 한국 드라마 정말 좋아해.

나 - 오.. 제가 다 기쁘네요..! 한국에는 정말 좋은 콘텐츠가 많아요!

심사위원 분이 드라마 제목도 이것저것 언급하셨으나 최근에 본 한국 드라마가 없어 대화를 계속 이어나갈 수 없었다. 흙..

감독 - 무슨 노래를 준비했죠?

뮤지컬 노래 한 곡, 팝 한 곡 준비해오라고 해서, 뮤지컬은 Rent의 ‘Take me or leave me’를 불렀는데 떨려서 노래 시작점을 놓쳤다.



그리고 다시 노래 시작.

1절을 다 불렀는데도 안 끊어서 심히 당황했다. 2절을 부르다가 결국 ‘2절까지 시키실 줄 몰라서 가사를 여기까지는 못 외웠어요…’라고 고해성사를 했다.

다른 노래도 들어보자고 했다.

나 - (눈치 보며) 저 케이팝 준비해 왔는데 괜찮나요?

감독 - 그럼요.

그렇게 나는 서문탁의 ‘사미인곡’을 불렀다. 한 때 나의 애창곡이어서 가사도 외울 필요 없이 내 타고난 성량을 잘 보여줄 수 있는 노래다.

정말 시원하고 커다랗게 불렀다. 오디션인데 마치 노래방에서 부른 것 마냥 그동안의 스트레스가 팍팍 풀리는 기분이었다.

이 노래 부른 가수의 이름이 무엇인지 감독님이 물어보셨다. 아주 오래된 노래고 ‘문탁 서’라는 가수라고 했다.

캐롤라인 - 예전에 ‘마틸다’ 오디션 보러 왔었죠?

또 다른 심사위원 ‘캐롤라인’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지난번 뮤지컬 마틸다 오디션 봤을 때도 뵈었다.

나 - 네! 기억하시네요!

기억하실 수밖에 없겠지요...
이곳에 아시아인이 오디션 보러 올 일은 거의 없을 것이고, 나처럼 이렇게 목소리랑 덩치 크고 동글동글한 여자 동양인은 흔하지 않으니..ㅋㅋㅋㅋ

저는 One and Only랍니다.. 허허허허…


캐롤라인 - 여기서 공부하는 거예요? 아니면 일?

나 - 일해요.

캐롤라인 - 무슨 일?

나 - 그래픽 디자이너예요.

캐롤라인 - 회사 이름이 뭐죠?

나 - 스타트업 회사라 말씀드려도 모르실 거예요.

오디션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내 노래를 들은 키 엄청 크고 예쁜 몰타 아이가 나에게 오더니 ‘너무 좋았다’며 칭찬해주었다. 아이가 얼마나 크던지 나에게 말을 거는데 고개를 쳐들어야 했다. 몰타에 이렇게 키 큰 사람이 있었다니.

아름다운 사람이 칭찬하면
맥신은 춤을 춘다오~


그러고 나서 춤 오디션도 봤다.

춤은… 망했다.

몸치는 아닌데 안무 금방 외우는 것에 취약하다😭
거기다 어린 몰타애들은 바로 캐치하고 잘 췄다..
얘들은 하나도 안지쳐 보이는데 나만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나이 많은 것에 스스로 한계 두지 않기로 했지만 이 상황에서는 도무지 그러기 쉽지 않았다.

밤 9시가 넘은 시각. 임시다에서 집 까지 걸어가는데 기분이 좋아 공중 위를 붕붕 걷는 것 같았다. 힘든 스케줄 속에서도 오디션을 용케 본 나 스스로가 너무 기특했다. 기념으로 저녁 늦게 까지 커피를 파는 ‘타투샵 Black Eye Specialist Tattoo Studio & Social Coffee’에 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디카페인으로 주문했다.


그 맛난 커피를 꿀꺽 마시는 순간 열심히 보낸 그날 하루가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면서 행복감이 밀려왔다.

참, 재밌는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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